[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그리스의 어느 골목 식당에 들어서면, 따끈하게 김이 솟는 오븐 앞에서 셰프가 큼지막한 틀에 칼을 넣는다. 바삭한 표면 아래로 고기와 파스타, 베샤멜 소스가 층층이 드러나는 순간, 테이블마다 기대 어린 시선이 쏠린다. 이 요리의 이름은 파스티치오(Pastitsio). 처음 먹어보는 사람에게는 라자냐 같기도 하고, 거대한 그라탕 같기도 하지만, 한입 베어 물면 확실히 다른 맛이 느껴진다. 그리스 특유의 계피 향이 고기의 풍미 속에서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제국이 남긴 음식의 기억을 되살린다. 전통과 식민, 지중해의 따스함이 골고루 녹아든 한 접시. 파스티치오는 그리스 가정의 평범한 일상 음식인 동시에, 역사가 차곡차곡 쌓인 미식의 시간 여행이다. 파스티치오를 이해하려면, 지중해 한가운데서 끊임없는 침입과 교류를 겪어온 그리스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이탈리아와 터키, 그리고 아랍 세계의 문화가 수백 년에 걸쳐 엮이면서, 그리스 식탁에도 다양한 요리가 흘러들어왔다. ‘파스티치오’라는 이름 자체가 이탈리아어 Pastizio에서 왔다. ‘혼합물’, 혹은 ‘뒤섞인 것’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정형화된 요리가 아니라, 여러 기반 문화가 버무
[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스웨덴 사람들에게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특별한 통조림이 있다. 못 열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냄새 맡아본 사람은 없다는 바로 그 문제적 음식. ‘수르스트뢰밍(Surströmming)’이라는 이름의 발효 청어는 바다 냄새를 넘어, 지구 어디에서도 맡기 힘든 충격적 향으로 악명 높다. 하지만 이 통조림 속엔 북유럽 사람들의 생존 본능과 저장 기술, 그리고 축제의 문화까지 오롯이 담겨 있다. 코를 막게 하지만 한 번 알고 나면 절대 잊지 못하는 맛. 스웨덴의 한여름, 발효 청어가 식탁 위의 스릴이 된다. 수르스트뢰밍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스웨덴에서는 소금이 귀했다. 그 귀한 소금을 아껴 쓰기 위해 청어를 살짝만 절인 뒤 발효시키는 방식이 생겨났다. 덕분에 혹독한 겨울에도 단백질 공급이 가능했고, 이 저장음식은 오랜 세월 북유럽 서민의 생존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 청어는 발효 과정에서 젖산균이 들어가 강렬한 향을 만들어낸다. 이 향은 흔히 ‘상한 음식’의 냄새와 비교되지만, 사실 과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다. 암모니아, 황 성분이 뒤섞인 이 향은 그저 도전자의 멘탈을 시험할 뿐, 식중독과는 거리가 멀다. 스
[뉴스트래블=김남기 기자] 한국의 사찰음식이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며 세계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은 올해 사찰음식의 철학과 가치를 알리기 위해 국내외에서 세 차례 국제행사를 개최했다. 6월 서울 aT센터에서 열린 ‘제4회 사찰음식대축제’에는 전국 11개 사찰이 참여했고, 이틀간 2만여 명이 방문했다. 20~30대 비율이 47%에 달하며 젊은 세대의 관심이 두드러졌다. 8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한국·미국·영국 등 5개국 전문가가 참여한 국제학술심포지움이 열려 사찰음식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10~11월에는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에서 문화외교 행사가 진행됐다. 파리에서는 한불수교 140주년 기념 만찬에서 사찰음식 장인 여거스님의 ‘더덕 버무리’가 호평을 받았고, 런던에서는 주영한국문화원과 르꼬르동블루가 공동 개최한 ‘한국 사찰음식 주간’을 통해 강연과 팝업 레스토랑이 운영됐다. 문화사업단은 사찰음식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며, 서울 인사동의 한국사찰음식문화체험관과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발우공양’에서 외국인 대상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자카르타의 분주한 아침, 교차로마다 뜨거운 연기와 코코넛 향이 뒤섞인다.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은 길가 포장마차에 들러 일회용 종이포장을 건네받는다. 그 안에는 ‘나시 레막(Nasi Lemak)’이 있다. 밥 한 숟가락에서 코코넛 밀크의 은은한 단향(甘香)이 올라오고, 그 위에 Sambal 소스의 칼칼한 매운맛, 땅콩과 멸치의 고소함, 반숙 달걀의 풍미가 조화롭게 얹힌다. 단순한 한 끼 같지만, 이 밥 한 그릇에는 인도네시아의 다문화적 뿌리와 동남아 해양 무역의 역사가 포개져 있다. 무엇보다 나시 레막은 아침을 ‘가볍게’ 여는 음식이 아니라, 하루를 풍성하게 시작하는 지역의 생활 방식 그 자체다. 나시 레막은 흔히 말레이시아의 국민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인도네시아에서도 일상적으로 사랑받는 음식이다. 특히 수마트라 지역에서는 코코넛 밀크로 지은 밥을 일상식으로 즐기는 전통이 오래되었고, 자바와 발리에서는 현지식 Sambal과 함께 접목되며 ‘인도네시아식 나시 레막’이 완성됐다. 기본 구조는 단순하다. 쌀을 코코넛 밀크와 판단 잎(동남아에서 향을 내는 기본 허브)과 함께 천천히 끓여 밥을 짓는다. 밥알은 윤기가 흐르고, 씹으면 부드
[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피단은 중국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여전히 낯설다. 계란 하나가 장시간의 자연적 변성 과정을 거쳐 전혀 다른 음식으로 재탄생한다는 사실은 외국인에게 종종 신비로움과 경계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피단은 단순히 ‘숙성된 계란’이 아니라, 알칼리와 광물이 만들어낸 중국 고유의 식품 과학이며, 지역 식문화의 맥락 속에서 완전히 이해되는 음식이다. 천천히 굳어가는 흰자는 유리처럼 투명한 흑갈색 젤리로 변하고, 노른자는 진득하게 농축되어 풍미를 응축한다. 이 변화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보존 기술이자 기후와 재료가 만든 지혜다. 한입 베어 물면 특유의 암모니아 향과 크리미한 질감이 어우러지는데, 처음엔 생경해도 곧 깊은 맛이 남는다. 피단은 ‘변해가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 그 미묘한 경계가 중국 식탁의 시간성과 맞닿아 있다. 피단의 기본 구조는 단순하다. 주재료는 오리 알, 그리고 이를 감싸는 흙·재·석회·소금·차잎 등의 혼합물이다. 이 재료들이 하는 일은 부패를 멈추고 알 내부의 단백질과 지방을 화학적으로 변성시키는 것인데, 이 과정 덕분에 피단은 열을 가하지 않고도 완성된다. 전통 제조
[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겨울이 길고 식재료가 귀하던 노르웨이에서 생선을 오래 보관하기 위한 지혜는 독특한 형태로 남았다. 그 이름이 바로 ‘루테피스크(Lutefisk)’. 건어를 물에 불리고, 다시 잿물(lye)에 담갔다가 여러 차례 씻어내는 과정을 거쳐 젤리처럼 투명한 식감으로 되살린 이 음식은 외형만 보면 생선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낯설다. 그러나 이 루테피스크는 노르웨이의 오래된 생존 방식이자 북유럽 겨울 문화를 상징하는 음식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노르웨이 식탁 곳곳에서 등장하고, 지역마다 나름의 조리법과 곁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낯선 조리 과정을 견디고도 살아남은 이유는 분명하다. 첫입을 넘기면 입안에 퍼지는 은근한 단맛, 부드럽게 풀어지는 섬유질, 그리고 바다의 기억이 깊이 각인된 풍미 때문이다. 루테피스크는 노르웨이가 겨울을 건너온 방식 자체가 ‘한 접시의 이야기’가 되는 대표적 음식이다. 루테피스크의 역사는 북유럽의 혹독한 기후에서 출발한다. 냉장 기술이 없던 시절, 노르웨이 사람들은 바다에서 잡은 대구(cod)나 링피시(ling)를 건조해 두고 오랫동안 저장했다. 이 ‘스톡피스크(Stockfish)’는 지금도 노르웨이 로포텐 제도 일대
[뉴스트래블=김남기 기자] 라틴 아메리카의 미식 지도가 한층 더 넓어졌다. Latin America's 50 Best Restaurants가 18일 런던에서 처음으로 51위부터 100위까지의 확장 명단을 공개한 것이다. 이번 발표는 다음달 2일 과테말라 안티구아에서 열리는 본 시상식에 앞서 진행됐으며, S.Pellegrino와 Acqua Panna가 후원한다. 확장 명단은 업계 전문가 300명의 투표로 결정됐으며, 총 26개 도시의 레스토랑이 이름을 올렸다. 가장 높은 순위는 멕시코시티의 Pujol이 차지해 51위에 올랐고, 살바도르의 Origem이 52위로 뒤를 이었다. 리마의 Shizen은 62위에 오르며 처음으로 순위권에 진입했다. 도시별로는 상파울루가 6곳의 레스토랑을 올리며 가장 많은 수를 기록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멕시코시티·파나마시티·산티아고가 각각 4곳을 배출했다. 새롭게 합류한 레스토랑으로는 파나마시티의 Umi(72위)와 Caleta(91위), 리우데자네이루의 Oseille(65위), 멕시코시티의 Em(71위), 카라카스의 La Casa Bistró(89위), 보고타의 Selma(96위), 산티아고의 Fukasawa(100위) 등이 있다. 코
[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스코틀랜드의 고원지대, 안개와 비가 뒤섞인 풍경 속에서 태어난 음식이 있다. 이름은 ‘해기스(Haggis)’. 양의 내장에 귀리, 양파, 향신료를 넣어 푹 끓여 만든 요리로, 처음 듣는 사람은 종종 “정말 먹는 음식 맞아?”라고 묻는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이 해기스가 스코틀랜드 정체성의 상징이자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다. 매년 로버트 번스의 시를 낭독하며 해기스를 먹는 ‘번스 나이트’가 열리고, 식당마다 해기스를 테마로 한 메뉴가 따로 있을 정도다. 가난한 시절에 버려지던 재료로 만든 음식이 세월을 지나 스코틀랜드의 얼굴로 자리 잡은 셈이다. 시각적으로 화려하지 않고 조리법도 단순하지만, 첫 숟가락을 뜨면 놀랍도록 풍미가 깊고, 고원의 거친 기운이 입안에 은은하게 흐른다. 해기스는 한 나라의 역사와 생존의 지혜가 어떻게 ‘맛’으로 응축되는지를 보여주는 요리다. 해기스의 기원은 스코틀랜드보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유럽 전역에서 동물의 내장을 이용한 요리는 흔했다. 유목민들은 사냥한 가축의 내장을 바로 활용해 영양을 보충했고, 북유럽에서도 내장 소시지가 일상 음식이었다. 하지만 해기스가 현재의 형태로 정착된 것은 스코틀랜드
[뉴스트래블=정연비 기자] 가을에는 전북의 조용한 소도시 완주로의 여행이 딱이다. 소박하지만 한적해 조용히 나만의 가을을 즐기기 좋다. 거기에 먹거리까지 넘쳐 여행이 더욱 풍성해진다. 완주는 도시의 속도와 달리 시간이 천천히 흘러,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여행자가 자연스레 숨을 고르게 되는 곳이다. 농촌의 들판 풍경과 가까운 생활권이 만나는 이 작은 도시는, 화려한 볼거리가 많지 않아도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방문객을 붙잡는다. 완주는 전통과 자연, 그리고 최근 급부상한 로컬 미식의 흐름이 한데 모여 ‘먹고 걷고 쉬는’ 여행지로 자리 잡고 있다. 가을이면 완주 들녘은 노랗게 물들고, 마을을 따라 난 길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 좋을 만큼 잔잔하다. 그래서 보통 완주 여행의 정석 코스로는 삼례문화예술촌 관람과 만경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라이딩 코스가 가장 먼저 언급된다. 완주군에서는 삼례 지역의 관광 활성화를 위해 ‘쉬어가삼[례:]’ 등 일부 대여소에서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으로 전기자전거 무료 대여 시범사업을 운영 중이다. 전기자전거는 초행자나 장거리 이동이 부담스러운 가족 단위 여행객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장비 부담 없이 바로 탑승해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는
[뉴스트래블=정연비 기자] 요즘 현대인의 혀는 맵고 짜고 달디단 맛에 끊임없이 노출돼 있다. 강한 맛이 반복되면서 미각은 지쳐가고 몸은 피로를 호소한다. 이제는 혀끝의 쾌락이 아니라 몸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회복을 불러오는 맛이 필요하다. 그 해답은 완주 봉동에서 찾았다. 천년을 견뎌온 봉동 생강이 그 출발점이다. 봉동 생강은 일반 생강보다 진저롤(Gingerol) 함량이 높아 매운 향이 선명하다. 이 알싸한 성분은 체내 대사를 자극하며 무뎌진 미각을 다시 깨운다. 떡볶이나 마라, 단 음료에 길들여진 감각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자연스러운 작용이다. 특히 생강 특유의 열감은 순환을 돕고 몸의 리듬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어 최근 ‘미각 리셋’을 원하는 여행자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완주로 향한 이유도 바로 이 미각 회복의 여정 때문이다 미각을 되찾는 길, 완주 생강 로드 천년의 생강 역사는 완주에서 시작됐다. 봉동읍은 한국 생강의 시배지로 기록돼 있으며, 가을이면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생강줄기가 고개를 내민 밭을 따라 걷다 보면 흙의 온기와 농부의 시간이 한 장의 농경화처럼 펼쳐진다. 굵고 단단한 뿌리가 땅속에서 천천히 시간을 품어온 풍경은 그 자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