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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에 두 시간이 흐르는 나라, 크로아티아

카페는 거실이 되고 점심은 의식이 된다
속도 대신 관계를 택한 사람들의 느린 일상 기록

[뉴스트래블=박주성 기자] 자그레브 구시가지 카페 테라스에는 오전부터 빈자리가 없다. 사람들은 작은 에스프레소 잔 하나를 앞에 두고 몇 시간째 자리를 지킨다. 노트북도, 업무 서류도 없다. 대신 손짓이 많고 웃음소리가 길다.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햇살을 등지고 등을 깊게 기댄 채 대화를 이어간다. 한국에서라면 ‘언제 일하지?’라는 말이 먼저 나올 풍경이지만, 이곳에서는 이것이 곧 일상이고 삶의 중심이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커피 한 잔 할래?”라는 말이 단순한 음료 제안이 아니다. 최소 두 시간을 함께 보내자는 약속에 가깝다.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삶의 안부를 묻고, 가족 이야기를 나누고, 동네 소식을 공유한다. 커피는 기호식품이 아니라 관계를 이어 붙이는 매개다. 실제로 현지에서는 ‘커피 한 잔’이 두 시간짜리 만남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

 

의외의 대비는 여기서 시작된다. 월드컵 결승까지 오르며 투지를 보여준 나라, 독립전쟁과 유고슬라비아 해체라는 격동을 견딘 사람들. 그렇게 치열한 역사를 통과한 이들이 정작 일상에서는 누구보다 느리게 산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끝까지 뛰고, 삶에서는 서두르지 않는다. 크로아티아의 진짜 얼굴은 축구장보다 카페 테이블 위에 더 또렷하게 놓여 있다.

 

 

카페는 거실이자 광장이다

 

자그레브 중심가를 걷다 보면 한 블록 건너 카페가 보인다. 테이블은 대부분 거리로 나와 있고, 사람들은 실내보다 바깥을 택한다. 햇빛과 바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까지 풍경의 일부가 된다. 한국처럼 ‘빨리 마시고 나가는’ 공간이 아니라, 오래 머무르는 것을 전제로 설계된 구조다.

 

흥미로운 점은 글로벌 대형 체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자리 잡지 못했고, 대신 동네 카페들이 골목마다 뿌리내렸다. 이들에게 커피는 ‘테이크아웃 상품’이 아니라 ‘관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작은 잔의 에스프레소를 천천히 음미하며 몇 시간이고 앉아 있는 문화 속에서, 회전율을 중시하는 체인 모델은 애초에 들어설 틈이 없었다 .

 

카페는 자연스럽게 지역 커뮤니티의 허브가 된다. 예술가와 학생, 직장인과 노인이 한 공간에서 뒤섞인다. 정치 이야기도 오가고, 축구와 가족사가 같은 테이블에 오른다. 19세기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 카페하우스 전통과 오스만 제국의 커피 문화가 만나 형성된 이 풍경은, 단순한 식음료 문화가 아니라 도시의 생활 방식 그 자체로 굳어졌다.

 

 

점심은 ‘끼니’가 아니라 ‘의식’이다

 

정오가 가까워지면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된다. 상점 문이 하나둘 닫히고, 거리의 발걸음이 줄어든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이유는 단순하다. 점심 때문이다.

 

크로아티아 가정에서 점심은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 갓 잡은 생선, 올리브유, 텃밭 채소가 식탁에 오른다. 서둘러 먹고 일어나는 법이 없다. 먹고, 이야기하고, 쉬고, 때로는 낮잠까지 잔다. 여름철에는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긴 점심시간을 갖는 전통도 남아 있다 .

 

관광객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다. 문 닫힌 가게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이 사회는 하루 한 번, 반드시 가족과 얼굴을 마주한다. 함께 먹는 시간이 공동체를 붙들어 두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지중해식 식단의 건강함보다 더 중요한 건, ‘같이 먹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밥값을 두고 벌어지는 실랑이

 

식당에서 재미있는 장면도 자주 목격된다. 계산서를 두고 사람들이 서로 먼저 내겠다며 실랑이를 벌인다. “놔둬, 내가 할게.” 웨이터를 먼저 붙잡은 사람이 승자다. 나머지는 다음 기회를 노린다.

 

이 문화의 뿌리는 발칸반도의 환대 전통, ‘고스토프림스트보(gostoprimstvo)’에 있다. 손님을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믿음이다. 척박한 환경과 잦은 분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서로 돕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내가 베푼 호의가 언젠가 나를 살릴 것이라는 공동체적 감각이 생활 습관으로 굳어졌다 .

 

길을 헤매는 여행자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거나, 카드 결제가 안 되면 옆자리 사람이 대신 계산해 주는 일도 낯설지 않다. 고맙다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담담하다. “괜찮아, 다 해결됐어.” 도움을 준 사실을 굳이 과시하지 않는다. 선의는 이곳에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태도다.
 

 

‘포말로’, 천천히 가도 괜찮아

 

달마티아 해안의 작은 부두. 노을이 번지는 바다 앞에서 한 노인이 낚싯대를 드리운 채 물결을 바라본다. 고기가 잡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바람과 빛을 느끼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현지인들이 자주 쓰는 말 ‘포말로(Pomalo)’는 이 장면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다. ‘조금씩’, ‘천천히’라는 뜻이다 .

 

배가 늦으면 기다리고, 날씨가 나쁘면 일정이 밀린다. 자연을 이길 수 없다면 맞춰 사는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 그렇게 형성된 생활 철학이 도시까지 스며들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고, 조금 느려도 삶은 굴러간다는 태도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많이 벌기보다 오래 함께 있는 쪽을 택한다. 효율보다 관계, 성과보다 과정. 커피 한 잔에 두 시간을 쓰고, 점심 한 끼에 하루의 리듬을 맞춘다. 격동의 역사와 전쟁을 통과한 사회가 도달한 결론이 ‘느림’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여행자는 이 나라에서 자주 멈춰 서게 된다. 문 닫힌 가게 앞에서, 끝날 줄 모르는 카페 대화 옆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우리가 너무 빨랐던 건 아닐까.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다음 약속을 걱정하는 삶이 과연 정상일까.

 

일주일 중 반나절만이라도 이곳 사람들처럼 살아보면 어떨까. 커피를 천천히 마시고, 가족과 오래 앉아 밥을 먹고, “나중에 보자”는 인사를 진심으로 건네면서.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면서.

포말로. 천천히. 그래도 삶은 충분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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